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만지로 (문단 편집) === 귀국과 취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p_of_John_Manjiro_voyages.jpg|width=100%]]}}} || || {{{-1 {{{#ffffff ▲ '''존 만지로의 항해 지도[* 1850년대에 만들어진 나카하마 만지로의 여행 지도. 어선 난파로 미국 포경선에 구조된 뒤 하와이와 태평양, 대서양과 아프리카, 인도양 등을 종횡무진한 그의 여행 경로가 표시돼 있다.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 || 그리고 이듬해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배를 한 척 사서 [[귀국]]을 결심한다. 그야말로 팔자에도 없는 다이나믹한 생활을 하다 일본으로 가는 계획을 세운다. 윗필드 선장에게서 배운 '이웃 사랑'의 개념을 힘입어 만지로는 "선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일본을 [[개국]]시키겠다[* 당시 미국의 포경선은 종종 일본에 난파, 표류했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막부의 '이국선 타불령'은 외국 선박에 엄격하게 대응하여, 이들 국가의 표류자는 감옥에 처박혀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미국에서도 반발의 목소리가 높았다.]"는 결의를 안고 결국 귀국 작전을 결행하게 된다. 도사로 고기잡이를 나가 표류하고 나서,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1851년]] 음력 2월 2일, 골드 러시에서 귀국 자금을 번 만지로는 하와이 [[호놀룰루]]로 간다. 지난번 항해에서 들른 지 3년 만에 표류 동료들과 재회를 했다. 역시 귀국을 희망하던 형들과[* 둘째형 시게스케는 하와이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만났고 현지에서 결혼하고 목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 하와이에 남은 토라에몬을 제외한 시게스케, 히츠노죠, 만지로는 귀국을 준비했다. 이때 윗필드 선장의 친구 데이먼 [[목사]]는 [[신문]] 기사를 내고 만지로의 귀국길을 돕기 위한 자금을 모으고 미국 [[영사]]에게 부탁해 만지로에게 [[여권]] 대신 [[신분증]]을 발급해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그는 여러 구호품도 모아주었다. 만지로가 구입한 상륙용 보트는 [[고래잡이]] 배였고, 이 배를 '어드벤처호(アドベンチャー号)'라고 이름 붙였으며, 곧 귀국길에 올랐다. 만지로는 하와이를 출발하기 전 윗필드 선장에게 그동안 키워주시고 미국 고등교육까지 받게 해주신 데 대한 [[은혜]]와 감사의 마음을 작별의 편지에 썼다. 만지로는 당시 쇄국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던 [[류큐 왕국]]으로 목표로 간다. [[상하이]]행 배에서 류큐 부근에서 조각배로 갈아타고 무사히 류큐의 오도해안(현재의 [[오키나와현]] [[이토만시]])에 도착한다. 호놀룰루항을 출항한 지 1개월 반 후 상륙했으나 당시 류큐를 복속 중이던 [[사쓰마 번]]에서 취조를 받게 되었다. 사쓰마 번 공무원들은 초소에 들어가 교대하고 몇 번이고 비슷한 일을 계속해 7개월 동안 심문한다. 만지로 일행은 류큐에서 취조받는 동안 현지 말도 익히고 마을 사람들과도 교제를 했다. 당시 류큐에는 1844년과 1846년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 군함이 내항했으며 사쓰마 번은 외국의 움직임에 주목해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쓰마번은 만지로 일행으로부터 해외 정보를 알고 싶어 했다. 이때 사쓰마 번은 이 3명을 [[가고시마]]로 소환키로 하고 1851년 7월 나하에서 사쓰마번의 배 다이세이마루로 출항해 12일 후 가고시마 만에 입항한다. 사쓰마에 도착하자마자 만지로 일행 3명에게 사쓰마 번은 저택을 제공하고 의상 외에 돈을 주고 주식을 제공하며 빈객과 똑같이 대접해주었다. 사쓰마 번의 조사는 류큐로부터의 정보를 받았는지 만지로 한 명에게 연일 집중 조사를 벌였다. 특히 만지로 일행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였다. 만지로는 평소 서양 문물과 기술 도입에 관심이 많았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호기심에 불려가 질문에 답한다. 만지로에게서 해외 사정과 지식을 얻고 싶은 나리아키라는 직접 만지로를 취조하기까지 했다. 만지로는 번주와 그의 부하들 앞에서도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리아키라는 만지로를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미국에서 배운 사람으로서, 또 선진적인 많은 경험을 한 [[지식인]]으로 취급했다. 만지로는 영어가 섞인 서투른 일본어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성장 배경부터 현재 상태까지 설명했고, 국민이 모두 법하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것, 국가체제나 [[대통령]]을 뽑는 일은 전 국민의 [[투표]]로 뽑히는 일이며, [[증기 기관차]], [[증기선]] 등 [[문명]]의 실정, 고래잡이 이야기 등을 열정적으로 얘기한다. 나리아키라는 만지로가 서양 배에 [[항해사]]로 승선해 세계 바다를 항해한 것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나리아키라는 만지로에게 "서양 배를 만들 수 있느냐"고 질문했고, 만지로는 "뱃사람들을 모아주면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나리아키라는 당장 번 내의 실력 있는 선목수 3, 4명을 만지로에게 보내서 서양선 조선기술을 배우게 했다. 만지로는 자신이 탔던 포경선 존 하울랜드와 프랭클린 호의 구석구석을 기억하고 그림을 그려 배의 구조들을 해설했다. 나리아키라의 특명으로 포경선 모형이 만들어졌고 또 이 모형선을 바탕으로 소형 범선 제작도 시작되었다. 서양식 범선은 현지 선목수와 동료들도 도와 주야간 돌관공사로 조선을 서두른 지 불과 48일 만에 완공했다. 진수(進水)의 날 가고시마 만 안은 지역 주민들에게 괴이한 모양의 배에 흥미를 느끼고 한번 보고 싶다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범선은 옷토센(越通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이 배를 모델로 해 증기 기관을 설치한 배가 나오는데 일본에서 건조된 최초의 [[증기선]]인 쿠모유키마루(雲行丸)였다. 당연하겠지만 쿠모유키마루는 기술적인 완성도는 낮았다. 그러나 불완전하지만 거의 독학으로 최초로 증기선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쿠모유키마루 건조는 획기적인 사업이었다는 평가다. 이후 그의 지식을 높이 산 나리아키라로부터 오히려 선생으로 임명하여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들에게 서양의 [[조선(동음이의어)#s-2|조선]]술과 항해술을 전수하고 번의 양학교(洋學校)에서 영어를 가르치도록 했다. 이때 [[알파벳]] ABCD… 노래를 일본에 처음 전파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 최초로 [[넥타이]]를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며, 최초로 '신아메리카 항해술'을 일본에 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다 다시 [[나가사키]] 봉행소로 옮겨져 긴 심문을 받게 된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나가사키 봉행 마키 요시노리(牧義制)[* 시마노카미志摩守라는 관직으로 알려져있다.] 앞으로 송장을 첨부하였다. "세 명의 표류민에게 장래 등의 문제가 일절 없다. 만지로는 영리하고 [[패기]]가 있다. 장차 반드시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인재]]이기에 결코 소홀히 다루지 말자."라고 편지를 보낸다. 나가사키 봉행소에서의 취조는 장기간동안 계속됐다. 봉행 마키 요시노리(牧義制)가 중심이 되어 만지로 일행에게 [[후미에]]도 시험해 보았으며,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이후 외국에서 가져온 물건은 몰수되었다. 당시 만지로가 일본에 들여온 물건은 이러하다. >서적(보디치의 항해술서, [[수학]], [[사전]], [[역사]], [[조지 워싱턴]] 전기, 농가력 등 13권의 영어 원서와 지도 7장) > >일용품(약, [[면도기]], [[성냥]], [[바느질]] 도구, [[가위]], [[시계]] 등) > >도구류(선구, 끌, 대패, 옥탄트(팔분의, 천체관측기), [[나침반]], 석판, [[권총]], [[총]] 등) > >의류(서양 의상, [[구두]], [[모자]]) > >귀중품(사금, [[금]], [[은]]) 이 몰수품 대부분은 훗날 에가와 타로자에몬(江川太郎左衛門) 등의 노력에 의해 반환됐다. 나가사키의 취조는 만지로를 이따금 짜증나게 했는데, 기껏해야 취조 한 번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물었고, 만지로는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쇄국체제 하의 유일한 창구이자 국제정세에 가장 밝은 위치에 있는 나가사키 봉행소의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지로가 서양의 신기술에 대해 설명하자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면서 일본도 빨리 개방 정책을 펴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그도 그럴만 한 것이 나가사키에서 행해지는 외국과의 무역은 에도막부가 직접 관리해서 관료들은 당연히 쇄국 정책을 유지하던 친막부 성향이었다.] 나가사키 봉행과 사쓰마 번의 대응 차이를 몸소 느끼고 있었다. 사실 사쓰마 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집안 어른들이 그가 서양문물을 너무 좋아한다고 걱정할 만큼 외국에 관심이 많고 매우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나가사키 봉행소에서 조사를 하던 중에 만지로 일행의 고향의 번주인 도사 번주 [[https://ko.wikipedia.org/wiki/%EC%95%BC%EB%A7%88%EC%9A%B0%EC%B9%98_%EC%9A%94%EB%8F%84|야마우치 요도]]로부터 '3명의 표류민을 인수하고 싶다'는 연락이 들어온다. 그 후 나가사키에서의 조사는 끝나고 도사 번에서 신병을 인수하러 온 17명의 관리들과 함께 6월 25일 나가사키를 도보로 고향 도사를 목표로 갔다. 일행은 배를 갈아타고 [[에히메 현]]에 도착한다. 다시 국경을 넘어 도사 국에 들어가 7월 11일 고치에 도착한다. 고치 성 아래에 이르자 만지로 등 표류민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마중을 나와 있다. 개혁파 인사였던 도사번 번주 야마우치 요도는 시마즈 나리아키라로부터 만지로라는 인물의 희귀한 체험과 박식함을 미리 듣고 있어서 하루라도 빨리 귀국을 원했지만 막부 소속인 나가사키봉행소의 조사가 장기간에 이르러서야 겨우 소원이 이루어졌다. 고치에서도, 역시 만지로 일행은 심문을 받게 된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도사 번 중신 요시다 도요(吉田東洋)가 선택한 고치 성 아래 제일의 지식인이자 [[화가]]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C%99%80%EB%8B%A4_%EC%87%BC%EB%A3%8C|카와다 쇼료]]가 심문을 맡게 된다. 카와다 쇼료는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으로 특히 그의 [[회화]]는 번으로부터 인정받아 [[에도]]에 나가 솜씨를 연마하고 돌아오자 요시다 도요의 문하에 들어간다. 쇼료는 요시다 도요의 해외정책론에 경도돼 "쇄국은 이미 오래됐다. [[대선]]을 건조하고, [[대포]]를 제조하고, 이국과도 교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사상에 공명해, 학문에 힘쓰고 있던 중에 만지로가 귀국한 것이다. 쇼료의 심문은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매우 온화해서 만지로가 기꺼이 해외 사정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때 만지로에게서 들은 해외 사정을 간곡히 기록한 저서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효손키라쿠(漂巽紀略)'다. 당시의 만지로의 증언록이며 요즘 말로 치면 미국 표류기다. 이 증언록은 오늘날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카와다 쇼료는 만지로의 이야기를 듣고 [[일러스트]]가 들어간 '효손키라쿠'라는 서양 정보 책을 썼다. 쇼료는 일본을 떠나기 전 무학(無學)이었던 만지로에게 일본어의 읽고 쓰기를 가르쳤고, 대신 만지로에게 영어를 배웠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d82a0e34a586f1875a9ced7ba9d263a.jpg|width=100%]]}}} || || {{{-1 {{{#ffffff ▲ '''효손키라쿠(漂巽紀略)에 그려진 포경선 존 하울랜드 호'''}}}}}} || 쇼료는 만지로가 말하는 이국(異國)의 이야기에 경악한다. [[증기선]], 거대한 군함, [[철도]], [[전신]] 등 [[과학]]기술의 격차에 일본이란 나라의 장래를 불안하게 느꼈다고 한다. 그는 만지로에게 들은 지식에 지도·풍물 등의 삽화를 곁들여 '효손키라쿠' 4권을 지었다. 본서의 서문에는 작자의 생각을 덧붙이지 않았을뿐더러 [[문학]]적 각색도 하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 삽화도 만지로의 그림을 바탕으로 그려져 있다. 이 책은 이 후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전편에는 풍향, 배의 진행 방향에 대해 상세하게 기재돼 있다. 또한 세계 각지 사람의 습속(習俗), 도시의 모습에 대해서 세밀하게 묘사했다. 만지로의 스케치를 토대로 그렸다는 삽화는 마치 사람이나 동식물을 실제로 보고 그린 듯한 느낌을 준다. 다만 [[해마]], [[증기 기관차]]의 그림 등은 예가 없었던 탓인지 정확성이 부족하다. 이 책에는 그 동안 만지로가 표류한 이후 겪은 내용들이 적혀져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도사에서 동료와 고기잡이를 나가다 → 폭풍을 만나다 → [[토리시마(하치조 지청)|토리시마]]([[이즈 제도]])에 당도하여, 어떻게든 수개월간 살아 남는다. → 미국 포경선에 구출되다 → 하와이에 기항 → 미국으로 건너가다 → 미국에서 학문에 힘쓰다 → 미국 포경선의 선원이 되어 세계 각지를 여행하다 → [[캘리포니아]]의 [[골드 러시]]로 목돈을 얻다 → 하와이 경유로 상하이행 배에 실리다 → 류큐에 도착 → 사쓰마·나가사키 취조를 거쳐 도사로 귀국." 또 쇼료는 '효손키라쿠'에 만지로가 미국에서 겪은 경험들을 듣고 그대로 적었다. 이 이야기들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준다. >재능과 학식을 가진 많은 사람 중에서 내세울 만한 인물을 뽑아 [[대통령]]으로 앉힌다. 그리고 그 임기는 4년을 한도로 하되 그 사람의 [[덕]]이 높고 정치력도 탁월하면 임기를 거듭하여 그 직을 계속할 수 있다.[* 당시는 아직 3선 제한이 없던 때였다. 3선 제한은 한참 후대인 [[FDR]] 사후에 수정헌법으로 제정된다.] >---- >미국의 대통령제도에 대해[[https://trillion-3934p.hatenablog.com/entry/2020/03/29/121620|#]] >세계 각국은 어디로든 항해를 하며 서로 교류하며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조난을 당하거나 우리와 같은 표류사태가 발생했을 때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각국의 요지나 항구에 [[영사관]]을 두고 있다. >---- >영사관에 대해[[https://trillion-3934p.hatenablog.com/entry/2020/03/29/121620|#]] >여기서 '시틴볼'(스팀보트.[[증기선]])이라고 불리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배를 탔다. 시틴볼은 선체 길이가 40여 간(間)으로 돛은 하나도 없고 단지 선체 중앙에 거대한 [[보일러]]를 설치했다. 그 보일러에 끓인 증기를 이용해 선체 안팎에 설치된 쇠바퀴를 돌리며 움직인다. 엄청난 속도란 비길 것이 없을 정도이다. >---- >[[증기선]]에 대해[[https://trillion-3934p.hatenablog.com/entry/2020/03/29/121620|#]] >[[새크라멘토]]에 상륙하여, '레이로우'(레일로드.[[철도]], [[기차]])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차. 레이로는 삼간사면의 철함에 석탄을 넣어 연소시켜 물을 달구고, 발한 증기를 철함에 충만시켜 그 증기를 철통 파이프로 이끌도록 만들어졌다. 그리고 앞의 시틴볼과 마찬가지로 철통을 지나오는 증기를 이용해 차체에 장착된 철륜을 돌려 움직이게 돼 있다. >---- >[[증기 기관차]]에 대해[[https://trillion-3934p.hatenablog.com/entry/2020/03/29/121620|#]] >단지, 이러한 번영, 번화 중에서, 한 가지 곤란한 일이 있었다. [[불량배]], [[깡패]] 같은 패거리들이 패거리를 짜고 시비를 걸다가는 남의 금품을 빼앗거나 심지어는 총을 이용해 살인을 저지르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패거리도 꽤 많아졌다.[[https://trillion-3934p.hatenablog.com/entry/2020/03/29/121620|#]] 이후 이 '효손키라쿠'는 취조관 요시다 분지가 '표객담기(漂客談奇)'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하기도 했다. 이국에 관한 정보 유포가 금지되는 가운데에도 효손키라쿠는 많은 [[사본]]이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된다. '효손키라쿠'는 만지로가 증언한 미국의 [[정치]]와 [[경제]], 사람들의 생활까지 컬러 그림으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효손키라쿠'의 애독자 중에는 [[사카모토 료마]]도 있었다고 하며, 후의 그의 신국가체제에 대한 구상인 '선중팔책'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한다. '효손키라쿠'라는 책과 존 만지로라 불리는 사람은 [[메이지 시대]]라는 [[여명]]을 여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4232|#]]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도쿠가와 후기와 메이지 초기의 일본인들에게 "[[미국|아메리카]]"는 만지로의 묘사의 아메리카였습니다. >---- >― 카와스미 테츠오(川澄哲夫, [[게이오기주쿠대학]] 교수)[[http://inspiringbiographies.blogspot.com/2010/08/john-manjiro-first-japanese-to-reach.html?m=1|#]] 이후 표류였기 때문에 불가피했다는 하소연이 먹혔고, 사쓰마번과 나가사키 부교쇼(奉行所)에서 장기간에 걸쳐 심문을 받은 뒤 [[무죄]] 방면 판결이 내려진다.[*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이들이 일본어를 잊어 버린 탓이었다.] 부교쇼에서 막부에 보낸 보고서는 “만지로는 대단히 예리한 자다.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다.”였다. 귀국하고 1년 반, 표류 이후로는 11년 10개월 만에 [[고향]]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만지로의 어머니와 가족들은 그가 14세 때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소식이 알려지지 않자 죽은 줄 알고 [[무덤]]까지 만들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바다에서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근처 다이카쿠지 경내에 자연석을 놓아두고, 그것을 만지로의 빈 무덤으로 정해 놓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아침 [[참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정말 만지로입니까! 제 아들 만지로입니까!"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고 한다. 귀향한지 사흘 만에 도사 번 다이묘인 야마우치 요도가 만지로를 소환했다. 그는 만지로에게 지역 [[엘리트]] 자제들에게 외국 경험을 가르치도록 주선했다. 미천한 어부 신분으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으므로 만지로를 다이묘의 가신, 곧 하급 [[사무라이]] 신분으로 승격시켰다. 만지로는 서구의 항해, 포경술 외에 영어도 가르쳤다. 그는 도사 번의 번교(번이 세운 학교)에서 [[교수]]로 임명됐다. 그는 이곳에서 미국의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독립정신, 세계 바다를 여행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가르친다. 이때 뒷날 도사 번의 참정이 되어 [[대정봉환]]에 기여한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D%86%A0_%EC%87%BC%EC%A7%80%EB%A1%9C|고토 쇼지로]],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82%AC%ED%82%A4_%EB%8B%A4%EC%B9%B4%EC%9C%A0%ED%82%A4|사사키 타카유키]], [[정한론]]을 주장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미쓰비시 그룹|미쓰비시]] 기업을 창업하는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9%80%EC%82%AC%ED%82%A4_%EC%95%BC%ED%83%80%EB%A1%9C|이와사키 야타로]][* 만지로에게 항해와 조선에 대해 배운 제자 중 한 명. 1875년 미쓰비시 [[증기선]] 회사를 설립하고 상하이 노선을 열었다. 정부와 유착 관계에 있던 미쓰비시 회사는 정부로부터 나가사키 조선소를 인수받아 조선회사로 발전시켰고, 일본은 이후 주요 증기선 조선 국가로 발돋움했다. 대하드라마 [[료마전]]에서 주역으로 등장한다.], 군인 [[https://ko.m.wikipedia.org/wiki/%EC%98%A4%ED%86%A0%EB%A6%AC_%EA%B2%8C%EC%9D%B4%EC%8A%A4%EC%BC%80|오토리 케이스케]], [[법학자]] [[https://ja.wikipedia.org/wiki/%E7%AE%95%E4%BD%9C%E9%BA%9F%E7%A5%A5|미츠쿠리 린쇼]] 등 일본 근세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젊은이들을 가르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